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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관문

이런 허술한 문을 넘겠다고 다들 버둥거리지만 제대로 하는 놈이 없으니 지루할 따름이다. 선임 문지기는 냉랭하고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아마 입술 아래쪽은 강하게 찔러 올리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래” “아니” 말고는 ‘좋다’라는 신호를 보일 때 입을 약간 벌린 연결된 침묵 말고는 꽉 다문 무거운 침묵만 유지할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선임이 잘라내는 움직임은 유달리 거칠고 막힘이 없었다. 마치 그동안의 침묵은 지금의 움직임을 위한 인내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확실히 선임은 이것을 위해 침묵을 유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문을 넘으려는 그 사람에게 “이런 건 왜 붙여 넣어요?” 라고, 묻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선임이 잘라 놓은 거대한 덩어리는 한 구석 어딘가에 쌓아..

김성춘 단편선 2024.09.26

42.출신

그가 대단한 인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통통 튀기고 있었다. “그렇게 되었다는데.” “그것참 대단하구먼.” “그런데 그렇게 되었다는 게 사실이야?” “그렇다던데?” “그것참 대단하구먼.” 놀라운 일이지. 어수룩한 얼굴로 어울리지 않는 옷가지를 몇 겹 걸치고, 말없이 동네를 왔다 갔다 하던 그놈이 그리 대단해지다니. 나는 그놈과 밥을 먹은 적도 있고, 간혹 장난친답시고 그놈의 등을 손으로 툭툭 치며 머리를 헝클어 놓기도 했었는데. 내가 그놈과 있던 시간을 사람들에게 늘어놓기만 해도 화젯거리가 되겠지. 모두 그놈의 진짜 정체를 궁금해하니까. 사실은 어떤 음식을 즐겨 먹었다더라, 사실은 어느 부분에서는 허술한 것이 있다더라, 사실은 그의 무심함과 매정함 안에는 다정함도 숨어 있다더라 ..

카테고리 없음 2024.09.23

41.혼란

작은 세계의 혼란이 작을 것이라는 착각은 보통의 세계가 가지는 지루한 특권이다. 한 손으로 손가락 하나하나를 구부려 나이를 세고 다른 손으로는 셀 필요가 없는 아이의 세계에서는 분명 혼란의 폭풍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혼란은 아이의 머리카락 끝의 부드러운 시작부터 발가락 위에 연하게 자리 잡은 껍질의 끝까지 꽉 차 있었다. 아이는 혼란이 주는 진동에 미약하게 온몸을 엇박자로 자리하고 있었다. 간혹 아이의 엄마가 “안돼 그거 위험해.” 라고, 부르는 진동이 아이를 거꾸로 뒤집어 버리기도 했다. 뒤집어 넘어진 아이의 엉덩이와 무릎을 털어낸 엄마는 아이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위험하다가 했잖아.” 아이는 자신의 몸을 사랑스럽게 툭툭 털어내는 엄마의 눈을 보며 혼란의 숙주에 대해 꺼내 놓고 떠올렸다. ‘누굴까’..

김성춘 단편선 2024.09.20

40.답변

여자가 나에게 물어보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여자가 당연히 이런 것쯤은 알고 있겠지 하는 투로 물어봐서 당당하게 모른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약간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여자는 의심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이것]은 알고 있죠?” 나는 [이것]은 알고 있었다. 모를 리 없지. 나는 곧바로 여자에게 [이것]에 대한 것을 주르륵 말해주었다. 여자는 내 대답에 조금은 안심한 모습이었다. 여자는 눈을 한번 깜박이더니 말했다. “두 번째, 두 번째 칸에, 그래요. 거기 서 있으세요.” 나는 여자가 말한 두 번째 칸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이 두 번째 칸인 것이지. 내가 서 있는 곳은 두 번째 칸이라고 할만한 게 없다. 굳이 말하자면 첫 번째 칸의 ..

김성춘 단편선 2024.09.18

39.결합

외로움이란 끔찍한 것이지. 대충 치워 버려야 할 것에 언제든지 이유를 붙여서 그대로 두게 되는 것이니까. 나는 손안에 파고드는 손잡이의 차가운 금속 재질이, 언제부터 피부와 구별되지 않은 것인가에 대해 “외로워서 그런 것 아닐까.” 하고 대충 둘러 대기도 했다. 분명 열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 나는 어째서 손잡이를 잡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내 눈앞에 꽉 차게 들어오는 삭막한 문은 그저 문 모양으로 된 그럴듯한 건축물일지도 모른다. 내가, 이 손잡이를 잡기 전을 돌이켜 보면 분명 울렁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어영부영 어딘가로 떠다녀서 맥이 빠진 상태였다. 그런데 손잡이를 잡고 힘겹게 당기는 모습을 하자, 울렁거리는 그것이 손잡이에 달라붙어 자기 껍질을 잃어버리고 손잡이에 빨려 들어갔다. 그래서 그랬는..

김성춘 단편선 2024.09.12

38.마법

도대체 언제쯤이면 그녀가 원하는 정답에 가까워질까. 그녀는 손안에 꼭 들어오는 정답의 오밀조밀한 감각을 짜릿하게 생각하며 지금의 불행을 만끽했다. “[그곳]은 어떻게 가요?” 그녀의 질문을 받은 청년은 두꺼운 얼굴에 약간 단춧구멍만 한 눈을 가졌다. 청년의 눈은 그녀의 질문보다 자신의 왼쪽 소매를 꽉 쥐고 있는 형체를 살폈다. 주글주글한 가죽을 얇은 뼈마디로 간신히 건져 올리고 있는 그것은 분명 그녀의 손이었다. 손에서 전달되는 힘은 보통의 간절함은 가질 수 없는 끈질김이었기에 청년은 왼손의 저릿함을 참아 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청년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가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얻고 싶어 하는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가진 정보를 손끝으로 어설프게 쏘아 보냈다. 여자는 아래로 흘러내리는 자신의 얼굴 가..

김성춘 단편선 2024.09.11

37.창대

“네, 그렇죠”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가 나를 구석으로 몰았다. 나는 구석에 자리 잡은 날카로운 모서리를 손으로 더듬으며 이곳의 싸늘함을 인지했다. 설마 그가 멀쩡히 이곳의 일원이 될 줄은 내가 알았겠는가. 처음의 어색함과 뻣뻣함이 만들어낸 무질서한 소음 안에, 나는 아무 의심 없이 뭉텅이의 무언가를 쏟아 넣었다. 내가 쏟아 넣은 것에는 그를 향한 맹목적인 분노나 실망뿐 아니라 언젠가 나에게 박혀 떨어지지 않았던 지독한 저주 같은 고통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의 나는 바로 뒤에 펼쳐질 무시무시한 일은 생각하지도 못했으니까. 언젠가 그를 하찮고 평범하게 여겼던 일원들은 그가 가진 거대하고 막을 수 없는 흐름에 예외 없이 깨져 나가고 가루가 되어 제 형체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한없이 작아져 가는 그들을 보..

김성춘 단편선 2024.09.10

36.심해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이란, 검고 깊은 바다 밑바닥에는 지겹게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가 주변의 이야기를 전해 듣기로는 누군가 불덩이를 손에 들고 바다를 건너다가 “맞아 이건 뜨거운 거였지!” 라며 알아차리는 순간 바다의 중앙에 떨어뜨렸다는 것인데, 그 이후 불덩어리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바다에 불덩어리가 잠식되었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졌지만 “그런 걸 꺼낼 수 있겠어?” “꺼내봐야 쓸 수도 없어.” “이미 식어 버리지 않았을까?” “식어버린 불덩이는 돌덩이보다 쓸모가 없을 텐데, 돌덩이랑 구분할 수나 있겠어?” “그럼 어쩔 수 없구나.”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라는 결론이 나왔으므로 그저 당연하게 잊어버린 물건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

카테고리 없음 2024.09.09

35.악수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만나는 사람마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들은 종이나 어떤 기록 장치에 무언가를 적었다. 1 한 전문가는 주름이 심하고 눈가가 휘어진 남자였는데, 나에게 물어보는 질문이 “그러니까 대체 그건 왜 그랬죠?” 라며 윽박지르는 것밖에는 없었고, 나머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 용어 같은 것들이었다. 나중에 다른 전문가에게 전문 용어에 관해 물어 보고 그것이 간단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를테면 ‘칼자국’ ‘살해 동기’ 같은 것이었다. 물론 남자가 혼자 중얼거리며 이야기하는 것들이었지만, 나는 그 중얼거림이 거슬렸다. 남자는 입을 앞으로 쭉 내밀고 처진 눈으로 ‘나의 내면을 전부 긁어내겠다..’라는 모양으로 쳐다봤다..

김성춘 단편선 2024.09.05

34.풍미

같은 것을 같은 시간에 먹다보니 속이 좋지 않았다.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먹다보면 풍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어요." 라고 추종자가 매번 같은 이야기를 같은 표정으로 하는데, '먹다보면' 이라는 부분에서 왼쪽눈썹이 살짝 들리고 오른쪽 입가가 푹 들어 가는 걸 알 수 있었다. '풍미' 라는 단어는 추종자가 적응을 못했는지 발음이 뭉개져 '퐁미' 나 '픙믜'로 들렸다. 하지만 '제대로'라는 말은 확실하게 했다. 이때 추종자의 입줄 주름이 두껍게 조여들었기 때문이다. '느낄 수 있어요' 라는 말은 '제대로'를 너무 힘주어 말하느라 힘이 쭉 빠진체로 뱉었다. 어떻게 보면 숨소리만 들리는 것 같기도 해서 "제대로 늑슈욱." 이라고 들렸다. 내가 원하지도 않은 음식을 계속 먹는 이유는 이곳에 지내기 위..

김성춘 단편선 2024.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