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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청소

손으로 툭툭 건드리니 ‘짤랑’이라던가‘철컥’이라는 소리가 났다. 이것을 치워야 이곳을 청소 할 수 있는데.이곳에 가져다 놓는 누군가의 뒷 태를 보긴 했으나, 내가 그 누군가를 향해 “거기는 두면 안돼요” 라고 말하지 못하고 “거기...” 라고 끊어지게 말하는 바람에 누군가는 멈짓 하지도 않고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의 냄새가 남아있어 코를 킁킁 거리며 정체를 추측해 보았지만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 괜히 옆머리만 긁적거렸다. 그냥 두고 간 것인지, 선물 한 것인지, 버리고 간 것인지 구별 할 방법이 있어야지. 이럴 때 시원하게 “치워 버리지 뭐” 라며 이것을 함부로 치워 버리는 무심함이 나에게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것의 주인이 나에게 찾아와 “여기 있던 물건 못 봤어요?” 라고 ..

김성춘 단편선 2024.11.27

52.질문

늙은 남자는 낡은 건설 자재에 엉덩이를 깔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잡은 늙은 남자의 가위 손가락 사이에는 담배 한 개피가 들어 갈만한 깊은 골이 패여 있었다.늙은 남자는 그저 이곳에서 맘 편하게 담배를 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아니, 그것 말고 늙은 남자가 당장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젊은 남자가 늙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늙은 남자의 담배연기가 젊은 남자의 몸에 달라붙자 젊은 남자는 연기를 손으로 뜯어 어딘가로 흘려보내고 물었다. “뭐해요?” 늙은 남자는 젊은 남자의 질문에도 담배 몇 개피를 더 태우고는 대답했다. “쉬잖아.” 젊은 남자는 늙은 남자의 담배연기가 닿지 않는 거리로 몸을 피하고 아무곳에나 앉았다. 늙은 남자는 젊은 남자가 어딘가에 앉은 것을 알고도 담배만 계속 피웠..

김성춘 단편선 2024.11.26

51.머리

왕이 나에게 머리를 모아오라고 명령했다. 나는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머리를 모으러 갔다. 머리와 몸을 분리 하는 일은 쉬운일이 아니다. 몸 위로 볼록 솟아오른 머리를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으로 비틀어 떼어낸다. 비명을 질렀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얼얼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미 굳은살이 베겨서 손가락이 아플일이 없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몸에서 떼어낸 머리는 그물망으로 들어갔다. 그물망에 머리를 처음 넣었을 때는 숫자를 천천히 셌지만, 그물망에 들어간 머리 수가 두자리를 넘어가면서 입으로 세는 건 그만두었다. 대략 '어느정도는 되겠지'라며 생각했다. 과정은 상관없다. 성과는 왕이 판단할 것이다. 그러고보니 왕은 이걸 왜 모으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머리는 고기로 쓸게 없다. 뼈..

김성춘 단편선 2024.11.25

50.경주

왜 나는 고슴도치야? 자동차나 오토바이도 아니고. 말, 타조, 원숭이도 있는데. 이놈은 탈 수나 있는 거야? 가시 때문에 만질 수도 없어. 빨간 트랙에 하얀 레일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6번째. 그나마 다행이다. 8번째라면 슬프다. 그것보다 슬픈 건 없다. '8번째 누가 있더라.' "그런 일이 있었어요?" 5번째 녀석이 말을 건다. 나는 "그렇죠." 라고 대답을 하고 5번째가 타고 있는 초록색 말을 봤다. 황금색 갈기, 바닥을 움켜쥐고 있는 튼튼한 다리, 붉게 빛나는 두 눈동자는 작은 태양을 얌전하게 박아 넣은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저걸…." 이라고 말했다. 5번째는 이미 나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는지 4번째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항상 이렇지." 심판이 오늘 새로운 규칙이 생겼다며 손가락을 하늘로..

김성춘 단편선 2024.10.20

49.의자

의자에 앉아 있으면 비로소 생각 나는 게 있다. 나는 척추를 가진 동물이라는 사실을. 앉기 전에는 엉덩이를 아무 곳에나 걸치고 싶은 마음에 몸을 늘어트려 발만 질질 끌다가도 의자에 엉덩이를 깔고 앉게 되면 ‘어떻게 앉아야 하지?’ 같은 어쭙잖은 생각만 하게 된다. 나는 분명 척추를 가지고 몸을 지탱하고 있는 살아있는 고기인 동시에, 어떻게 앉는 것이 맞는 것인지 헷갈리는 혼란스러운 고기다. 언젠가 좋아 보이는 의자에 앉은 적이 있다. 금으로 덮여 있고, 손이 닿는 곳에 빛나는 보석이 있으며, 머리가 닿는 등받이는 은색 깃털이 풍성하게 박혀 있어 언제나 귓가나 눈가를 간지럽히기 때문에 “이거는 왜 있는 거야” 라는 말을 4일에 한 번은 해줘야 했다. 그리고 등받이에 우둘투둘하게 돋아난 돌기 때문에 앉아 있..

김성춘 단편선 2024.10.11

48.습득

그는 오래된 바다에서 돌을 발견했다. 깊고 검은 바다의 끄트머리에서 파도가 밀어낸 수많은 돌조각 중에, 그의 손에 닿는 것이 생겨난 것이다. 그는 손에 들어온 돌의 질감을 느끼며 “부드럽다.” 라고 말하면서도 둘에게 ‘부드럽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인지 고민했다. 손바닥에 올려진 돌을 물끄러미 보니까 녹색인지, 청색인지, 아니면 이 세상에는 없는 색인지 “아니,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없지.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줍지 못했을 테니까.” 그는 그런 것으로 생각하며 엄지손가락 마디 하나만 한 돌을 자기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볼록 튀어나온 모습을 누군가에게 유심히 보고 있지 않은지 주변을 살폈지만 “있을 리가 없지” 이곳은 그 말고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으니까 들킬 것인지 보여 질 것인지 생..

김성춘 단편선 2024.10.07

47.요괴

1.자신의 매력을 이용해 남을 조종한다. 2. 약속을 쉽게 어긴다. 3.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4. 매사에 냉정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5. 목적 없는 대화를 싫어한다. 6. 모든 인간관계는 득실에 의해 정해진다. 7. 약자에게 함부로 대한다. 이런 것을 요괴의 특징이랍시고 떠벌리고 다닌다니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다 . 사실 위에 특징은 요괴와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이 특징이 나오게 된 과정을 생각할 때는 두 가지의 경우로 추측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일을 처리하는데 과정을 설명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평가. 설명할 필요 없이 번쩍번쩍 일 처리 하는 사람을 보고 앞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렇게 느낄 수 있다. 인과의 사슬을 스스로 끌고 가는 사람은 생..

김성춘 단편선 2024.10.04

46.침몰

그녀가 적절하게 취한 것 같다. 중심선을 놓친 동공이, 보이지 않는 기분에 의해 힘없이 휘둘러지는 것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건네는 과거의 이야기에 “맞아, 그랬었네.” 같은 형태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내 말을 듣는 내내 코를 찡그리며 얇은 주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냈다. 접힌 콧등 주름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는 ‘무언가’에 확실히 전달되는 신호가 되었다. 내 마음속 ‘무언가’는 자기도 구겨진 형태로 있었지만, 그녀의 콧등 주름과 불안하게 떨어대는 동공은 확실히 보고 있었다. 나는 내 마음속 ‘무언가’에 “어떤 것 같아?” 라고 물었는데, 별다른 대답은 없었다. 분명 ‘무언가’의 시선이 느껴지지만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입장에서 ‘무언가’가..

김성춘 단편선 2024.10.03

45.공부

스승님이 말씀하셨다. “채워 넣는 것과 쌓는 것은 차이가 있다.”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곧바로 스승님께 여쭈어보지 않았다. 다행히 스승님은 나의 이해를 아시는 분이었다. 스승님은 손가락 하나를 펴서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무질서하게 쌓아 올리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 무언가에 채워 넣는 것은 반드시 결과를 내며, 그 결과가 무엇이든 사실이 되는 법이다.” 나는 스승님의 말을 듣고 참을 수 없는 간지럼을 느끼며 질문했다. “만약 채워 넣은 결과가 나쁘면 어떻게 하죠?” 스승님은 나의 질문에 왼쪽 눈썹을 번쩍 들어 올리고는 씩 웃으셨다. “나쁜 것인지 알지 못하고 좋은 것인지 알지 못해. 그것을 채워 넣는 사람은 스스로 좋고 나쁘고를 알지 못하는 것이지. 심지어는 스스로는 ..

김성춘 단편선 2024.09.30

44.우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우산을 잃어버렸다. ‘생각을 해보니’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생각 없이’ 지낸 것일까. 아니, 어쩌면 어딘가에 ‘생각을 뺏긴 것’ 일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나는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식사하며 “우산…. 우산….”이라고 중얼거리는 바람에 아버지의 못마땅한 눈길을 받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방문을 닫고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는 몇 가지를 추려 보았다. -비싼 우산을 산다. -손에 묶어 버린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한다. -비가 온다. 첫 번째 방법 비싼 우산을 산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값진 것이 우산이라면, 나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돈을 많이 쓴 것에..

김성춘 단편선 2024.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