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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험

선생님이 말씀 하셨다. "시험지 뒤에까지 돌려." 몇몆 친구들은 갑작스러운 시험에 "뭐?" "왜?" "아직 아닌데." 라며 조용하게 중얼거렸지만, 나는 그 순간만큼은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줄 알았지.' 나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누구도 준비하지 않은 때에 오직 나만 준비 할 수 있는 날 말이다. 몇날 며칠을 오로지 나 혼자만 이 시험을 위해 준비를 해 두었다. 나는 약간 긴장 했지만, 그동안 준비 했던 것을 착실하게 머릿속으로 굴려보며 시험지를 받았다. 그러데 나는 첫 문제를 보는 순간 당황했다. 1.당신이 어제 먹지 못한 이유는? [ ] 나는 빈칸에 억지로 [그렇다] 라고 쓰기는 했지만,맞는지 틀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준비한 시험 유형과 전혀 다른 방식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기대와 ..

김성춘 단편선 2024.08.01

2.철학

“그건 상당히 철학적이네.” 남자는 입안 가득 음식물을 씹으며 말했다. 나는 남자가 어느 부분에서 ‘철학’을 느꼈는지 알지 못했지만, 확실한 건 입에 넘치도록 음식이 들어가 있음에도 조금 더 밀어 넣는 그의 손이 애처롭게 떨려 보인다는 것이다. 남자는 자신의 감상이나 평가에 반드시‘철학’이라는 단어를 썼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무튼 남자가 ‘철학’이라는 단어를 쓸 때 미간과 입가는 굳어진 것처럼 단단하게 조여졌으며 발음이 뭉개지지 않기 위해 말을 천천히 하려고 애썼다. 신기하게도 음식이 남자의 입안에 꽉 들어찼는데도 ‘철학’이라는 단어는 내 귀에 확실히 안착하였다. “이게 확실히 철학적 메시지가 있어.” 남자는 간혹 나에게 책을 읽어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남자가 권하는 책은 요즘 유행하는 글처럼 부드럽..

김성춘 단편선 2024.07.31

1.악마

요즘 내가 불쾌하게 생각하는 건 내 이름이 너무 저급하게 불린다는 것이다. ‘악마 같은 인간….’‘악마 같은 행동….’ 내 이름으로 저주한다는 것은 악의 상징으로써 뿌듯한 일이지만, 문제는 너무 하찮은 것에 내 이름을 써버리는 것이다. 내가 저렇게 저급하게 일 처리를 한다는 말인가. 겨우 저런 걸로 “당신은 악마야!” 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악마가 아니고서는 그럴 수 없어….”라며 얼굴을 부여잡고 절망스러워하다니. 가끔은 인간들의 격렬한 반응에 내가 그렇게 저급하게 일 처리 했었나 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단연코 나는 그런 식으로 일 처리 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한 몰락이다. 결코 자잘한 생채기 따위에 관심을 가질 리 없다. 예를 들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팔꿈치가..

김성춘 단편선 2024.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