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춘 단편선 51

21.용암

깊은 용암 안에는 밝고 울렁거리는 호수가 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 걸까. 사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 라며 용암 안에 호수를 상상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호수는 맑을까? 호수는 차가울까? 호수는 물렁거릴까? 호수는 손안에 흐를까? 만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용암 속 호수를 손으로 푹 떠서 “이게 용암 안에 있는 호수야!” 라고 사람들에게 떠들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용암은 자기 안에 꼭꼭 숨겨져 있는 호수를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다면, 용암은 호수를 어떻게 견뎌 낸 것일까. 어쩌면 용암은 호수를 모른 척한 것은 아닐까. 울렁울렁 움직이는 호수를 모른척하고 태연하게 꾸르륵꾸르륵 흘렀던 것일까. 만약 용암이 호수를 품고 모른 척한 것이라면 그것만큼 무서운..

김성춘 단편선 2024.08.19

20.할인

여자는 새 비닐에 따뜻한 빵을 조심스럽게 넣으며 말했다. “요즘은 바쁘신가 봐요?” 여자는 그러면서 남자를 향해 직접적이고 분명한 시선을 보내기는커녕 자기 말을 뱉어 놓고 그저 묵묵히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비닐에 빵을 담는 여자의 손길은 기계처럼 건조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초조함 같은 게 있었다. 여자의 초조함이, 숨과 손 움직임 사이에 꽉 차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게 했다. 남자는 다행히 여자의 초조함이 어느 한계를 넘어가기 직전에 대답했다. “뭐, 그렇네요.” 여자는 남자의 대답에 안심하고 다시 초조함을 뺀 담백한 손놀림으로 투명한 비닐에 빵을 담았다. 남자는 여자의 손놀림을 구경하며 자기 바로 앞에 놓인 팻말을 보았다. [전날 생산 할인 행사] 팻말 아래는 여자가 손수 움직여 놓고 있는 따뜻한 것..

김성춘 단편선 2024.08.18

19.출근

그녀와 꿈같은 상상을 하는 그를 보면, 상상이 주는 달콤함은 사람을 들뜨게 하는 게 확실하다. 그러나 상상은 또한 그의 신경질을 한 가닥 한 가닥 긁어모아 그를 분노의 제단에 올려놓는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한다. 그는 평소에도 붉은 남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붉은 남자는 성실함과 거리가 먼 불규칙의 화신인 동시에 “그런 건 괜찮지 않아?” 라며 사람들과 간단하고 쉬운 대화를 한다. 오늘도, 어제도, 지난주에도 성실함의 기계화를 몸에 장착한 듯 일정한 출근을 하는 그로써 붉은 남자의 불성실함과 나른함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장은 붉은 남자의 불성실함과 나른함을 질책하기는커녕 “그래, 자네 말대로 하자고.” 같은 한심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기껏 붉은 남자가 내놓은 아이디어라고 해봐야 아주..

김성춘 단편선 2024.08.17

18.블루

나는 블루의 질문지를 뒤적이며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블루가 하품하는 바람에 그쪽을 보고 말했다. “너무 지루하죠?” 블루는 손바닥을 흔들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인터뷰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루는 자신의 눈썹을 살짝 들어서 대답을 대신 했는데, 길게 뻗은 눈썹이 내 오른쪽 얼굴을 간지럽혔다. 나는 블루가 신경 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손으로 오른쪽 뺨을 살짝 긁었다. 인터뷰는 블루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어요.” 라는 말로 대부분의 이야기를 끝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블루가 몇 살 때 이야기하는 것인지 헷갈려서 “그러니까 그게 13세 때라는 거죠? 아니면 17살 때의 일인..

김성춘 단편선 2024.08.16

17.손님

옆집이 시끄러운 걸 보니 손님이 온 모양이다. 좀 조용히 해주면 좋으련만 저 집 주인은 이웃을 배려하는 편은 아닌 것 같다. 우리 집은 입김이 나오는 걸 보니 추운 모양인데, 나는 집을 따뜻하게 만들 생각을 해보다가 손님이 오지 않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나는 허기를 느꼈다. 오랜만에 느낀 허기다. 먹을 것이 있던가. 나는 소파에 박혀 있던 엉덩이를 뽑아내고 주방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아, 바닥이 끈적거려 발바닥이 쩍쩍 달라붙었다. 나는 발목에 단단히 힘을 주고 걸음을 옮겼다. 주방에는 먹을 것을 대신하는 먼지가 고르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식탁 위에 단단하게 달라붙은 먼지를 손으로 쓸어 입에 넣었다. “맛이 없다.” 아니, 사실은 혀를 감싼 텁텁하고 어두운 맛이 나기는 했지만 내가 구별할 만한 것은..

김성춘 단편선 2024.08.15

16.위치

네 번째, 그놈은 알 수가 없는 놈이다. 그 이유가 가능성이나 기대감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것이라면 좋으련만, 그런 것은 또 아니다. 네 번째는 그저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는 것인데,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바보짓이란 무엇이냐. 두 번째가 말했다. “너무 멀다는 거지.” 나는 그런 것인가 하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조금 더 길게 생각하려고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는데, 세 번째가 말하는 바람에 내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통하지 않는 것.” 그렇지 세 번째의 말에 생각할 것이 없이 확실했다. 바로 알아들었다. 맞다 네 번째는 늘 통하지 않는 짓을 꽤 오랫동안 하고 있다. 그것참 바보 같은 짓이다. 두 번째는 손가락으로 나의 등 쪽을 쿡 찌르며 말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찔린 등짝을..

김성춘 단편선 2024.08.14

15.희생

희생은 필요하다. 나는 손바닥을 휘저으며 애처로운 몸짓에 거침없는 사형집행을 이행했다. "당연하지" 내 몸에 들러붙는 그것들은 이렇게 처리하는 게 마땅하다. 다른 것에 희생은 망설여 지지만, 그것의 희생은 어째서인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나는 그것을 없애지 않으면 피를 내 주어야 하니까. 그것이 목숨을 걸어야 내 몸에서 일어나는 흡혈의 행위를 넘어갈 만하다. 한 방울 정도의 피라면 그것 하나의 몸체를 수장시키는 것도 일이 아니지만. 사실이야 어떻게 되었든 그것은 알맞은 양의 피만 빨아 먹고 뚱뚱해진 몸으로 느릿하게 달아 나는 것이다. 아마 그것은 "나는 이 정도, 그 이상의 피는 필요 하지 않지만, 네가 나를 죽인다면 받아들일 마음은 있다." 라고, 하는지 모른다. 공정하지 않은 상황 일지도 모른다. ..

김성춘 단편선 2024.08.13

14.완벽한 선택

그녀에게 있어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은, 자신의 선택이 가장 별로였다는 사실이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녀의 귀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걸?” 이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듣게 되는데, 이때 누군가의 불뚝거리는 입술 아래에 감춰진 조롱의 낌새를 그녀는 알아차리게 된다. 감춰진 조롱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도 못하고 그녀의 불쾌감만 스멀스멀 자극하는 때에, 그녀가 선택했던 결과들이 의례 그랬던 것처럼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대 놓고 판명이 나서야 그녀는 “그럴 줄 알았어.” 라며 어금니를 꽉 깨물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된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선택의 결과물은 과거의 그림자가 되어 그녀의 뒤태에 얌전히 달라붙는데, 그녀는 그림자를 잘라 내는 데 성심과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끊어질 리가 없지. 과거의 선택은 ..

김성춘 단편선 2024.08.12

13.탈출

하얀 블록으로 만든 전함을 타고 옥상으로 떨어졌다. 옥상은 문이 닫혀있어 아래층으로는 내려가지 못한다. 매번 이런 식이지. 옥상으로 떨어졌을 때부터 '못 나가겠구나.' 라고, 생각했으니까. 옥상 문이 강하게 잠겨져 있던 것은 아니다. 문고리를 확 잡아 당긴다면 문을 여는 것은 쉬울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으로서 그런 야만적인 방법은 안 된다. 이곳의 관리인을 불러서 정중하게 "하늘이 회색이긴 하지만 문제 될 건 없겠죠?" 라고 한다면 알아들을 텐데. 이 건물의 관리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사실 지난번 전기면도기가 고장 나서 서비스센터에 갔을 때 관리인이라는 사람을 알 수 있었다. 수리기사가 면도기를 확인하고 말했다. "배터리가 터져서 교체해야 해요." 나는 배터리가 무한한 것이 아니냐며 따지고 싶었지..

김성춘 단편선 2024.08.11

12.공포

보고 말았다. 지난주쯤에 보지 않아서 오늘에서는 드디어 발견하지 않는 것이구나 하면서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는 길게 늘어진 가래침을 손인지 뭔지로 쭉 뽑아내고 어딘가를 한참이나 감상하듯이 넋 놓고 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제발…. 그만 좀 해줘.” 그의 왼쪽 골반이 뒤틀어진 채로 “으악!” 이라는 비명이 차분하게 들리는 것 같은데, 그는 귀에 귀지가 딱딱하게 들어찼는지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작은 웅덩이에 오래된 빗물이 차 있는 것 같은 그의 눈두덩이에서 주르륵 눈물이 떨어지는데, 북받치는 감정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노쇠함이 부르짖는 당연한 신호 같았다. 그는 오늘도 나의 소매를 붙잡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지난주까지만 하더라도 “제가요….”..

김성춘 단편선 2024.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