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춘 단편선 51

31.부정

“그건 불가능해”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나는 그에게 말하면서 위에 두 가지 문장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그는 반드시 둘 중 하나의 문장으로 대답했기 때문이다.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화가 아니라 내 말이 그에게 입력이 되면, [그건 불가능해] [어떻게 안 거야?] 둘 중 어느 문장이 쏟아지는지 유심히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대화라고 할 수 있는지 나 자신도 고민하게 되지만, 그에게서 삐져나온 가느다란 갈증의 진심을 보면 무심하게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에게서 대답이 나왔는데, 나는 혼자 잡다한 생각을 하느라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의 대답 부분 중 ‘부정’을 들었으니, 나는 그저 변명 없이 “그런가?” 라며 ..

김성춘 단편선 2024.08.29

30.전달

거대한 푸른 잎으로 정성스럽게 감싸 놓은 누군가의 식사는 아기자기한 어린 요정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어린 요정은 손안에 들러 있는 도시락을 눈으로 힐끗 보고는 “늦으면 안 되는데....” 라며 중얼거렸다. 급하게 움직이는 발걸음으로 가늠해 보자면 어린 요정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영리한 어린 요정이 자신의 발걸음과 도착지 사이의 시간을 헷갈리는 일은 없을 텐데, 어린 요정의 마음에 불안감은 없어지지 않았다. “뭐가 불안해?” 누군가 어린 요정에게 질문했다. “늦으면 안 되니까.” 어린 요정은 누군가의 [질문]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곳에서는 종종 불분명한 [질문]이 질문을 불쑥하고는 했으니까 이상해할 것은 없지만, 어린 요정에게는 드문 일이기는 했다. [질문]이 ..

김성춘 단편선 2024.08.28

29.날씨

차가운 바람이 그의 얼굴에 닿았을 때, 겉면이 뻣뻣해지고 얼얼해지는 통에 “아프군” 이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침을 흘리듯 불쑥 내뱉고는 입을 급하게 닫았다. 얇게 짜인 섬유는 애처롭게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한 가닥의 섬유도 찬바람의 침투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여 피부와 뼈, 그리고 어딘가까지 움츠러지게 했다. 그럼에도 그는 갈라진 입으로 “안돼 아직” 라며 중얼거렸다. 강추위에 집에 돌아온 그였지만 온기의 충만함을 느끼지는 못하고 냉기의 전면적인 충돌만 피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냉동고에서 냉장고로 들어간 것과 비슷했다. 그는 손을 뻗어 얇은 이불을 몸에 덮고 치아를 딱딱 부딪치며 온기를 부르고 추위를 물러가게 했다. 하지만 온기를 불러들일 수 있는 행위라 한다면 전혀 소용없는 짓..

김성춘 단편선 2024.08.27

28.기쁨

누군가의 탄생, 누군가의 승리, 누군가의 결합, 누군가의 회복이 기쁨의 원인이 된다면 좋겠지만, 나는 당최 그러지 못한 인간인 것 같았다. 가슴속의 열기와 머릿속의 전기 신호가 팡팡 울리는 지금의 상태는 분명 누군가는 기쁨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대외적으로 늘어놓고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되었다. 내 상태의 원인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한 예상이 맞았다는 것. “역시 그놈은” 징그러운 놈이 맞았다. 이제는 내가 그놈에 대한 예상을 표면상 드러내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은연중에 품고 있던 예상이 현재 일어난 어떤 사건과 꽉 차게 들어맞았다. 그러니 내가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 그놈을 봤을 때의 메스꺼움을 이제는 인류의 보이지 않는 감시 아래서 숨기지 않아도 되는 ..

김성춘 단편선 2024.08.26

27.시계바늘

“자리가 없네?” 나는 그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내가 앉아 있는 자리를 가늠했다. 3명까지는 넉넉히, 4명부터는 예의 바른 자세가 필요한 크기였다. 나는 무릎을 바짝 붙이고, 더 이상의 말이 들리지 않길 기대했다. “앉아 있던 사람은 배려심이 부족하다니까.” 그는 당연한 것을 이야기한다는 투로 작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배려심만큼은 스스로 가늠하기 어려우니까. 나는 무릎에 힘을 더 조이고 자리의 구석에 바짝 다가갔다. 등과 엉덩이가 자리의 각진 부분과 만나니 어떤 모양이 잡히는 것 같았다. 나는 엉덩이가 만들어낸 각진 것을 상상하며 손에 들고 있던 읽을거리에 눈을 고정했다. 그가 말을 걸었다. “요즘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게 미덕이잖아요? 그런데 배려라는 걸 ..

김성춘 단편선 2024.08.25

26.오해

오해의 시작은 '서로 잘 지내보자'라는 넘치는 마음에서 시작해. 나는 절대 일방적인 화를 내지 않는 편이야. 사람이건, 동물이건, 일단은 친해지고 싶으니까. 그런데 어떤 일이라도 반드시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없어. 오히려 내 뜻이 넘쳐나면 해결하기 어려워지기도 해. 그렇다고 누군가가 오해를 일부러 조장했다는 생각은 안 해·오해는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무더기로 있는 끔찍한 사건이잖아. 일부러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내가 오해의 피해자 한 사람으로서 피해 현황을 살펴보면 억울하거나, 답답하거나, 실망스럽거나, 위협적이거나, 싱거워지거나, 급하게 굴거나, 귀밑머리가 당겨지거나, 미간이 여덟 조각 나거나, 아, 너무 많아. 너무 많다는 말이야. 지긋지긋한 오해가 이렇게 많은 결과를 낸다는 ..

김성춘 단편선 2024.08.24

25.구조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는 소용없는 짓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 어쩌면 나 스스로가 멍청한 생각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깊고 지저분한 호수에 빠져 ‘나 좀 어떻게 해줘’ 라고 뻥긋거리며 구조 신호를 보내던 것은 그가 아니던가. 나는 분명 그의 움직임을 보았고, 동시에 그의 손을 잡고 끌어 올렸다. 나는 끈적하게 달라붙는 그의 손바닥을 통해 지독하게 응집된 호수의 찌꺼기를 느끼고 있었다. 내 손바닥에 달라붙은 호수의 찌꺼기는 주름의 틈새를 뚫고 내 속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오래전에 겪었던 것이니, 나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아니었다. 내 혈액에 돌고 있는 거부의 물질이 호수의 찌꺼기를 밀어냈다. 나는 그에게 찌꺼기 씻는 법을 알려 주었다. ..

김성춘 단편선 2024.08.23

24.착용

한 공간에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물질이 살아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므로 “별로 놀랄 것은 없어?” “놀라지 않았어요. 그냥 어떻게 생겼는지 본 거예요.” 그는 플라스크를 내려놓고 말했다. 플라스크를 건드리지 않는 그의 왼쪽 새끼손가락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는데, 나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는 책상 위로 손바닥을 올려놓고 떨리는 왼쪽 새끼손가락을 억지로 누르며 말했다. “그런데 왜 두 가지 이상의 물질이 한곳에 있어요?” “한 곳에 두 가지가 피어난 것처럼 보이는 거야.” 책상위에 올려지 ㄴ 그의 왼쪽 손이 하얗게 탈색될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왼쪽 손에 피가 돌지 않아 못 쓰게 되는 것은 아닌지 살짝 걱정되었지만, 일단은 설명해야 하는 순간임으로 계속 이어서 말했다. “뭐든지 동시에 존재하지..

김성춘 단편선 2024.08.22

23.우물

우물이 상했다. 나는 우물물을 바닥에 뱉어낸 후 바닥에 그려진 물 자국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왜 상했을까?’ 그러나 나는 곧 우물이 상한 이유를 따질 수 없게 됐다. 먼저 그 우물의 가치를 따지는 것이 우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이럴 수가 나는 우물의 시작점도 짐작할 수 없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를 붙잡고 이 우물을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나를 가볍게 보고는 “그냥 두어야지.” 라고 말했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또 다른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그 사람은 두꺼운 손으로 자기 얼굴을 받치며 고민하더니 말했다. “글쎄요…. 메워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김성춘 단편선 2024.08.21

22.상식

상식이라는 것은 단단하면서 유연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이 얼마나 포악한 말인가. 누군가의 생각을 거대한 무언가로 간단히 잘라 낼 수 있다는 것이. 그럼에도 잘려지는 생각은 상식의 칼날에 온전히 순종하거나, 비참하게 도망칠 뿐이다. 혹은 상식의 칼날을 이겨내고 새로운 칼날이 되어 다시 상식의 칼날에 먹혀버린다. 결국 사람이라는 것은 상식의 단단함에 자유로울 수 없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야.” 이 얼마나 온화한 말인가. 가냘픈 생각의 다리가 광활한 건너편에 미처 닿기 전에 결과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제시한다. 마치 ‘상식’이라는 생명체가 생각의 저편에 있는 결과의 모양을 보고 “충분히 함락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라며 충직한 척후병의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이 얼마나 유용한 생명체..

김성춘 단편선 2024.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