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춘 단편선

17.손님

김성훈. 2024. 8. 15. 08:50

옆집이 시끄러운 걸 보니 손님이 온 모양이다. 좀 조용히 해주면 좋으련만 저 집 주인은 이웃을 배려하는 편은 아닌 것 같다. 우리 집은 입김이 나오는 걸 보니 추운 모양인데, 나는 집을 따뜻하게 만들 생각을 해보다가 손님이 오지 않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나는 허기를 느꼈다. 오랜만에 느낀 허기다. 먹을 것이 있던가. 나는 소파에 박혀 있던 엉덩이를 뽑아내고 주방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아, 바닥이 끈적거려 발바닥이 쩍쩍 달라붙었다. 나는 발목에 단단히 힘을 주고 걸음을 옮겼다. 주방에는 먹을 것을 대신하는 먼지가 고르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식탁 위에 단단하게 달라붙은 먼지를 손으로 쓸어 입에 넣었다.

“맛이 없다.”

아니, 사실은 혀를 감싼 텁텁하고 어두운 맛이 나기는 했지만 내가 구별할 만한 것은 없었다. 냉장고에 손을 대서 가볍게 열려고 힘을 주었지만 잘되지 않았다. 왜 그런지 냉장고 문이 딱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입에 힘을 꾹 주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쫙하며 오래된 테이프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냉장고가 열렸다. 냉장고 안에는 시큼하고, 꿉꿉하고, 그리고 또…. 무슨 냄새가 나는 것일까. 아무튼 어떤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알 수가 없었다.
냉장고 안에는 먹다 남은 사과가 쪼그라든 상태로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고 입에 넣었다. 너무 끈끈한 탓인지 끈적한 과육에 사로잡혀 치아 하나가 빠졌다. 나는 치아를 뽑아낸 과육 뭉치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만약 손님이 온다면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냉장고에 잔뜩 채워 넣어야지.
냉장고 구석에는 반쯤 남은 맥주 캔이 있었는데, 먹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을 몇 번 흔들어 보고 싱크대 구멍에서 불쾌한 냄새가 올라오길래 맥주를 부어버렸다. 가스레인지 옆에는 올리브유가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손으로 툭툭 건드려 보았다. 프라이팬은 끈적하게 기름때가 달라붙어 있어 내가 칼로 기름때를 긁어내다가 프라이팬 코팅이 손 한 뼘만큼 벗겨냈다. 이것은 아마 쓸 수가 없겠지. 손님이 찾아온다면 이런 것은 진즉에 버리고 반듯하고 깨끗한 주방용품을 샀을 텐데. 나는 언젠가 보았던 튼튼한 구리팬을 생각해 보았다.
주방의 전등이 깜박거려 눈이 아팠다. 나는 주방 전등을 꺼버리고 다시 거실 소파로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발바닥에 무언가 바삭하고 밟혔다. 나는 끈적이는 무언가와 가벼운 껍질 형태가 내 발바닥에 붙어 있는 것을 상상했다.

“바퀴벌레인가?”
아마 그럴 테지 그것도 살아 있는 바퀴벌레는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이 느린 내 발바닥에 깔려 죽을 리 없다. 언제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죽음에 나의 책임도 있겠지. 나는 발바닥에 붙은 바퀴벌레 잔해를 그대로 둔 상태로 쩍쩍 울리는 소리를 내며 소파로 돌아왔다. 나는 소파에 아무 조심성 없이 몸을 쾅 하고 던졌는데, 양털 크기만 한 먼지가 내 눈높이만큼 떠 올랐다. 그것 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건져내며 생각했다.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분명 먼지를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았는데, 먼지는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혹시 먼지는 이곳에서 가장 자유로운 것이 아닐까. 만약 그것들을 치우지 않고 꽤 오랫동안 둔다면 먼지로 이불을 짤 수 있을까. 양털과 비슷하니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보다는 옷을 해 입어도 좋을지 모른다. 생각해 보니 옷을 만드는 법을 모르니 그냥 두껍게 얽힌 먼지를 덮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툭툭
누군가 현관문을 둔탁하게 두드렸다. 드디어 손님이 온 것인가. 나는 그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앞에는 차가워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금테 안경을 쓰고 자신에게 꼭 맞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가 신고 있는 구두가….

“형광색이네요.”
“그렇죠, 형광색이죠.”

남자는 나의 중얼거림에 안경을 올려 쓰며 대답했다. 나는 구두를 닦을 때, 형광색 구두약을 쓰냐고 물어보려다 남자가 말하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먼지투성이네요. 너무 춥고”

나는 남자에게 먼지는 곧 치울 것이고, 곧 따뜻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남자는 가지런히 정리해 놓은 자기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거 잘 되었네요.”

나는 남자에게 곧 정리를 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손님이 오면 해야 할 것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늘어놓았다. 생각보다 해야 하는 것이 많았다. 청소하는 것은 물론이고, 야채와 과일을 사와야 하고, 신선한 음료도 필요하다. 또한 생각해 두었던 구리팬을 살 수도 있었다. 그건 좋은 일이다. 손님의 핑계로 그런 것을 살 수 있다니. 그리고 발바닥에 붙은 바퀴벌레의 껍질을 손님 모르게 떼어 내야 하는데 그가 멀뚱하게 지켜보는 상황에서는 조금 민망했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친 상태로 발바닥에 붙은 바퀴벌레 껍질을 다른 쪽 발가락으로 슬슬 긁어냈다. 생각보다 떨어지지 않아서 약간 인상을 쓸 뻔했다. 손님에게 그런 꼴을 보일 수는 없지.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보았는데, 그는 자기 손목에 달린 금색 시계를 살피고는 말했다.

“제가 많이 기다릴 수가 없네요.”

나는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어 그럼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다음에는 꼭 많은 시간을 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남자는 입을 어딘가로 쭉 내밀다가 코에서 숨을 빼고 말했다.

“글쎄요 그것도 약속할 수 없네요. 저는 오늘 이후로 여기에 올 일은 없어서요.”

나는 너무나 아쉬운 마음이 들어 그럼 어쩔 수 없지만 행복한 인생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남자는 감사하다며 아직 자신의 할 일이 남았다며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는 서류뭉치를 꺼내 살피며 말했다.

“끝났습니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끝날 수 없다고. 이런, 이 남자는 손님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손님은 이런 절망적인 소식을 저렇게 태연하게 말하지 않겠지. 나는 조금 더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아직 손님이 오지 않았어요. 손님이 오면 집을 따뜻하게 만들고, 먼지는 치우고, 싱싱한 야채와 과일을 냉장고에 가득 채워 넣고, 반드시 구리팬도 사야 하는데요.”

좋다 나는 몇 번씩 굴려본 생각을 제대로 이야기했다. 남자는 나의 대단한 열변에 입을 살짝 벌리고 안경을 손으로 한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조금 더 정지된 상태로 있다가 말했다.

“이런 곳에 누가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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