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춘 단편선

46.침몰

김성훈. 2024. 10. 3. 13:15

그녀가 적절하게 취한 것 같다. 중심선을 놓친 동공이, 보이지 않는 기분에 의해 힘없이 휘둘러지는 것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건네는 과거의 이야기에
“맞아, 그랬었네.”
같은 형태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내 말을 듣는 내내 코를 찡그리며 얇은 주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냈다. 접힌 콧등 주름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는 ‘무언가’에 확실히 전달되는 신호가 되었다. 내 마음속 ‘무언가’는 자기도 구겨진 형태로 있었지만, 그녀의 콧등 주름과 불안하게 떨어대는 동공은 확실히 보고 있었다. 나는 내 마음속 ‘무언가’에
“어떤 것 같아?”
라고 물었는데, 별다른 대답은 없었다. 분명 ‘무언가’의 시선이 느껴지지만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입장에서 ‘무언가’가 내비치는 행동과 감정의 껍질이 나에게 정교하게 들어왔다. 내 마음속의 ‘무언가’는 어딘가에서 손가락을 꺼내 나의 등을 쿡 찔렀다. 나는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너는 남들과 달라. 너무 대단한 것 같아.”
그녀는 이런 말을 듣고 싶었는지, 아니면 듣고 싶은 것처럼 착각되어 있는 건지, 두꺼운 콧소리를 내며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지고 조금 더 나아갔다.
“아냐, 너는 자신감도 넘치고, 못 하는 것도 없고, 나는 절대 못 할 것 같아.”
내 마음속 ‘무언가’는 살짝 웃으며 내 등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그런 말은 하지 말라며 나를 향해 손을 휘저었는데, 딱딱하게 굳은 담배 냄새가 휙 하고 내 콧속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얼마나 깊이 연기를 탐닉해야 생겨나는 냄새인지 궁금했다. 그녀는 이야기 중간에 눈을 꾹 눌러 웃는 것처럼 보였는데, 싱싱하던 때는 없었던 자잘하고 칙칙한 주름이 틈틈이 박혀 있었다. 내 마음속 ‘무언가’는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며
“만약 내가 너처럼 살았으면 아무것도 못 했을 거야.”
라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따라주는 술을 입으로 급하게 털어 넣고 더운 숨을 뱉었는데, 입가에 깊게 팬 어둠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내 마음속 ‘무언가’는 살짝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그녀는 두껍게 튀겨낸 새우를 통째로 씹어 먹으며 자신이 그저 편한 데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은 훌륭한 것이라며 말하면서 그녀의 우악스러운 몸체를 흘겨봤다. 그녀의 좁고 가느다랗던 어깨는 두껍게 위로 솟았고, 손으로 쥘 수 있을 것 같던 허리는 푹 삶은 면발처럼 퉁퉁 불어 있었다. 굴곡이 사라진 그녀의 몸체를 보며 내 마음속 ‘무언가’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꺽꺽댔다.
나는 그녀가 먹어 치운 새우튀김을 한 세트 더 주문하고 술 한 병을 주문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말을 겉으로는 부정하는 듯했지만, 비쭉거리는 입술이 긍정의 방향으로 왔다 갔다 했다. 생생한 붉은 빛을 가지고 있던 그녀의 입술은 이제 본연의 색을 잃고, 끊어지듯 내려오는 뻑뻑한 세로 주름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라며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했다. 그녀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미간을 꾹 힘주었는데, 누군가가 손가락 굵기만 한 대못으로 중간을 푹 하고 뚫어 놓은 것 같았다. 나는 유달리 밝고 둥글게 빛났던 그녀의 이마를 생각해 내다가
“역시, 너는 달라.”
라고 감탄의 말을 뱉었다. 비워진 그녀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나는 내 손에 들어온 술잔을 살짝 흔들어 그녀에게 건배할 것을 요청했다. 그녀는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진 얼굴로 비딱한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몸짓으로 자신의 술잔을 내 술잔과 부딪쳤다. 그녀는 한 번에 술을 털어 넣고, 나는 개미 숨만큼 마시며
“나는 술도 너무 약해 너처럼 잘 마시면 좋을 텐데.”
라며 혀를 내밀고 말했다. 그녀는 왼쪽으로 기울어진 고개를 살짝 흔들며 그런데 뭐가 중요하냐며 말했는데, 옆으로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은 창고에 박힌 건초처럼 푸석푸석했다. 과거의 풍성하고 윤기 넘치던 그것은 이미 흔적도 남기지 않고 어딘가로 흘러 나갔을 것이다. 내 마음속 ‘무언가’는 귀를 들썩이며 웃다가 그녀의 눈을 보라며 손가락질했다. 까맣고 깊게 박혀 있었던 그녀의 눈은 뿌연 것이 답답하게 올라왔는데, 중간중간 짐승의 뭉쳐진 타액이 섞여 있는 것 같이 노랬다.
아름다웠던 그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름다움을 손에 쥐고 또래를 오만하게 유린했던 그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겨우 이런 것에, 평범한 여자라면 우습게 간파하는 하찮은 전략에, 그녀는 왜 이렇게 쉽게 당하는 것일까. 그녀는 왜 자신이 침몰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어째서 환각과 환청이 섞어 놓은 해괴망측한 알약을 삼키고 헛소리를 해대는 것일까. 어째서 알려주는 사람이 없는 것일까. 너의 아름다움이 녹아 버렸다고. 너는 지금 그냥 괴상하기만 하다고. 알려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그녀와 보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속. ‘무언가’의 움직임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아무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 이것은 그녀가 치루는 죗값일지도 모르지. 오만한 아름다움으로 또래를 찍어 눌렀던 씻지 못할 죄에 대한값. 그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축 처진 그녀의 왼쪽 볼을 보며 말했다.
“나는 네가 부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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