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으로 빛이 들어오자, 남자가 그것을 따뜻하게 생각하고
“좋다. 이건 좋다.”
라며 웃었다. 언제쯤 느꼈던 자유로움과 따스함인지, 남자는 자신의 과거를 훑으며 커피를 마셨다.
“앗 뜨거워!.”
그러나 커피는 남자가 아름다운 생각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지 괴팍한 열기를 내며 혀끝을 꼬집었다. 머그잔 안에 검은 커피는 남자에게 뜨거운 입김을 뱉으며
‘그럴 수 없지.’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커피의 농락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부탁이다.”
그렇다고 커피의 열기가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지금의 평화를 자신의 무릎 근처에 꽉 붙들어 놓으려고 했다. 남자는 일단 커피의 열기를 모른척하고 창문 밖을 살폈다.
부드럽게 말랑거리는 구름과 적당하게 희고 푸른 하늘과, 깊은 나뭇잎이 콕콕 박힌 나무와…. 그리고 엄지손톱만 한 말벌 두 마리가 뒤엉키면서 창문을
쿵쿵
두들기는 바람에 남자는 쇳소리가 섞인 비명을 내지르며 커피를 무릎에 쏟았다. 남자는 당장 세면대로 달려가 찬물을 자기 몸에 급하게 적셔 대며
“이럴 줄 알았어….”라고, 중얼거렸다. 남자는 곧 울상이 되면서 날아갈 것 같은 평화의 뒤꽁무니를 어떻게 붙잡아야 하는지 골똘히 생각하다가 냉장고에 있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덩이를 입에 급하게 넣었다.
차가움과 부드러움과 달콤함이 한곳에 뭉쳐져 있는 것은 아마 이것밖에 없을 것이라며 떠나갈 것 같은 평화의 뒷덜미를 확 낚아채 다시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넣었다. 남자는 다시 붙잡은 평화를 힘을 주어 고정한 후에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남자의 방안에는 부드러운 담요와 적당한 높이의 베게, 그리고 튼튼한 울렁거림을 가진 침대가 곱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남자는 침대 아래에 놓인, 오래된 앨범을 꺼내 들었다. 남자는 앨범 가죽 테두리를 손으로 쓸면서 거슬거슬하게 올라온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느꼈다.
남자는 곧 앨범을 펼치고 박제된 과거의 순간들을 구경했다.
남자는 몇 번은 웃었고, 몇 번은 슬픈 듯한 표정을 지었고, 대부분은 아무 표정 없이 턱이 몇 겹으로 눌린 채로 좋거나 나쁜 부분을 찾아 헤맸다.
사진의 좋은 점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당시의 기분을 지금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고, 나쁜 점은 지금 느끼는 기분을 손으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남자는 사진의 좋은 점에 기대서 나쁜 점의 당연한 공격을 여러 차례 받아 가면서 결국은 아내와 아이의 사진으로 눈을 고정했다.
남자의 아내와 자식은 사진 속에는 있지만 지금 자신의 옆에는 없었다. 그들은 어딘가로 떠났지만, 남자에게는 아마도 동의를 구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사실 동의를 구한 것 같았지만, 남자가 어찌할 수 없이 그들의 동의를 수락한 것밖에 되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의 평화중에 일부분을 가족들이 담당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며, 그들이 어딘가로 떠난 지금에서는 평화가 분명 뜯겨진 것으로 생각했다. 만약 평화가 온전한 상태라면 지금처럼 남자의 겨드랑이 사이에 꽉 조여진 채로, 어딘가로 날아가려고 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평화는 이미 스스로 평화가 아닌 것을 알아 버린 것처럼 남자를 향해
‘나를 그만 놓아줘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에게 평화는 평화였으며, 그것은 어딘가로 평화의 몸체가 뜯겨 나간 지금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침침해진 눈가를 손으로 훅훅 쓸어 내고는 앨범을 닫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남자는 천장을 바라보고 누울 때면 콧바람과 한숨을 한꺼번에
“후….”
하며 쑥 내미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건 아마도 평화가 오늘도 지켜졌다는 안심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곧 천장을 보는 이때에도 평화의 탈출을 걱정했다.
“천장이 쏟아지는 것은 아닐까.”
남자가 말한 대로 천장이 쏟아지는 일이 지금 당장 일어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만약 천장이 그대로 남자를 덮쳐온다면 아마 평화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평화와 함께 자신도 어딘가로 갈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평화가 되는 것을 아닐지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자의 눈이 스르륵 감기며 자기 품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빼는 평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것도 좋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