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춘 단편선

49.의자

김성훈. 2024. 10. 11. 09:53

의자에 앉아 있으면 비로소 생각 나는 게 있다. 나는 척추를 가진 동물이라는 사실을. 앉기 전에는 엉덩이를 아무 곳에나 걸치고 싶은 마음에 몸을 늘어트려 발만 질질 끌다가도 의자에 엉덩이를 깔고 앉게 되면
‘어떻게 앉아야 하지?’
같은 어쭙잖은 생각만 하게 된다. 나는 분명 척추를 가지고 몸을 지탱하고 있는 살아있는 고기인 동시에, 어떻게 앉는 것이 맞는 것인지 헷갈리는 혼란스러운 고기다.
언젠가 좋아 보이는 의자에 앉은 적이 있다. 금으로 덮여 있고, 손이 닿는 곳에 빛나는 보석이 있으며, 머리가 닿는 등받이는 은색 깃털이 풍성하게 박혀 있어 언제나 귓가나 눈가를 간지럽히기 때문에
“이거는 왜 있는 거야”
라는 말을 4일에 한 번은 해줘야 했다. 그리고 등받이에 우둘투둘하게 돋아난 돌기 때문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불쾌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데, 이것은 차마 말로 표현하기는 언짢아서 잠깐 일어나 돌기의 모양을 확인하고 다시 앉았기를 반복했다. 물론 돌기의 모양이 의자가 좋아 보이는 증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증거에 대한 확인이 불쾌감을 덮지 못하는 때에는 다시 불쑥 일어나 인상을 쓴 채로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불쾌감과 증거에 대한 확인이 서로 경쟁하다가 나는 좋아 보이는 의자건 아니건 그곳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언젠가는 편해 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신기하게도 그 의자는 내 몸이 흘러내는 형태 그대로 생겼는데,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내가 왼쪽을 본 거야 오른쪽을 본 거야?”
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이유야 어쨌든 그 의자는 나의 몸이 움직이는데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그 의자에 앉은 지 다섯 계절이 지나고 나는 우연히 지나가는 친구를 부르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내가 소리를 낸 것인가 아닌가를 구별할 수 없었다. 의자가 너무나 편하기 때문에 나의 몸은 의자에 맞게 녹아 버린 것이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아마 성대나, 혹은 다른 어떤 것이 녹은 것이겠지. 나는 녹은 몸을 수습하고자 ‘일어나자’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 순간 나는 생각과 몸의 연결 지대가 녹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생각과 몸의 연결 지대를 다시 연결하느라 10 계절을 보냈다.
간신히 연결 지대를 연결하고‘일어나자’라는 생각이 내 몸을 일으킬 때쯤에 나는 습지에서 기어 나오는 것 같은 가느다란 신음을 냈는데, 녹은 몸이 의자에 달라붙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의자에 달라붙은 내 몸을 떼어 내느라 다시 12 계절을 보냈다.
편해 보이는 의자에서 내 몸을 분리한 채로 나는 한발 한 발 내디딜 수 있었는데, 척추의 휘청거리는 움직임에 몸 안에 붙어 있는 살들이 딸려 가는 모양이 되었다. 척추와 얇은 뼈들이 몸과 일치된 상태로 걸을 때까지 다시 20 계절을 보냈다.

그다음은 아주 불편해 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는 없고, 엉덩이를 받칠만한 부분은 둥근 것인지, 뾰족한 것인지, 혹은 두꺼운지 얇은지 불분명했다. 나는 아주 불편해 보이는 의자에 앉기 위해 자세를 여러 번 바꿨다.

1초를 80개로 쪼개고, 80개로 쪼갠 것 중 한 개를 다시 800번 쪼갰다. 그리고 쪼개진 마지막 800개의 것 중에는

‘어떻게 해야 앉을 수 있지?’

같은 생각이 800개의 작은 물방울로 맺혀 있었다. 그것은 생각이라도 부를 수 없으며, 본능의 소리와도 거리가 멀었다.
800개의 작은 물방울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크게 생각하고

‘잘못 앉으면 어떻게 하지?’

같은 생각으로 조금 더 쪼개겠다. 나중에는 800개의 물방울이 얼마큼 쪼개지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지경에 왔을 때, 내 속에 깊은 곳에서 무심하고 폭력적인 것이 튀어나왔다.

“너무 지겹다.”

그리고 쪼개진 것들을 다시 1초로 뭉쳐냈다. 그리고 나는 아주 불편해 보이는 의자에서 벗어났다.
한동안 나는 아무 의자에 앉을 수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의자의 외관에 집중하지 못하고, 풀어진 내 몸체를 수습하지도 못하고, 흩어진 생각을 뭉쳐내지도 못하니까 그저 어딘가로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없이 걷다 보면 역시나 척추는 내 몸을 지탱하는 두꺼운 기둥이고, 그것에 달라붙은 나뭇가지 같은 뼈마디나, 어설프게 걸쳐진 살은 펄럭거리기만 했다.
나는 다리가 아파 무심코 어딘가에 주저앉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앉은 곳에는 나뭇잎으로 얽혀 놓은 그늘막이 있어 상쾌한 바람을 온전히 맞을 수 있었다. 나는 그제야

“편하다.”

라는 말이 나왔는데, 내가 앉은 곳을 확인하니 내 엉덩이만한 작은 바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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