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의 어깨를 파고드는 가방끈을 손으로 당겨 고쳐 맸다. 가방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토해내는 숨을 보면 가볍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종아리에서 올라오는 혈액의 힘찬 펌프질을 느꼈지만, 동시에 펌프질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기도 했다. 또다시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내리막을 걸으며 그는 무릎에 박혀오는 땅의 단단함과 울퉁불퉁함을 자신의 이로 꾹 물어 막아내고 있었다. 그는 감정과 상관없이 흐르는 눈가의 물을 손으로 걷어내며 생각했다.
‘얼마나 남은 것일까?’
그가 처음 언덕을 건너 그곳에 도달하기로 처음 발을 들여놓은 때부터, 지금까지 몇 개의 언덕을 건너왔지만
‘몇 개인지도 모르겠다.’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시작 지점에서 예상했던 언덕의 개수는 이미 건강하고 밝게 타오르던 신체의 기운과 함께 잊혀 갔다. 지금은 그저 지나온 언덕을 세어가는 게 아니었다. 끝날 것 같은 기대를 무참하게 짓밟는 새로운 언덕의 등장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다. 그의 귓가에는 언덕을 오르지 않았던, 못했던 사람들의 응원과 냉소, 그리고 침묵까지 들려왔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들으며 이를 물었다. 그는 그래도 언덕을 오르고 내리고 있다. 지겹지만 다리를 질질 끌며 멈추지 못하는 어떤 마음을 담보 잡고 겨우 움직이는 것이다. 그는 또한 언젠가 멋들어지게 늘어놓았던 그곳의 환상을 떠올렸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는 그곳에 품었던 대단하고 웅장했던 마음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가볍게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뭐냐’
언덕은 그릴 수도 꿈꿀 수도 없는 곳이었다. 방금 그의 발바닥을 찔러 오던 땅의 돌기 같이, 몸에 긁혀 오지 않으면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없다. 설명할 필요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이미 그곳에 도달했던 사람들은 비밀을 약속했는지 모른다. 언덕의 황망함과 무정함을. 언덕이 가지는 의미 없는 배경을. 오로지 이곳에서는 한 사람의 시간만큼 늘어지고 좁혀지며 한 점의 집중을 발바닥으로 찍어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그곳의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말하고 싶은 마음도, 말할 수 없는 조건도 그들에게는 그저 지켜봐야 하는 즐거움이자 고통일 테니. 언덕과 그곳을 마음대로 말하는 자는 멋대로 동경하는 마음을 품은 자와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주변에 부스러기 같은 부분들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을 지속시키지 못했다. 생각과 기대의 껍질은 이미 썩어 문드러져 가루가 되었지만 부자연스러운 걸음만 남아 땅을 꼭꼭 밟아 갔기 때문이다. 그는 그 발걸음조차 멈추었다. 이미 눈앞에 또 다른 언덕이 보였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그 뒤에 또 다른 언덕이 보이는 듯했고, 또 그 뒤에,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언덕의 곡선 그의 눈과 어딘가에 닿아 갔다.
‘저것은 언덕이었을까’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멈춰진 자리에 서서 그곳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는 그렇게 느꼈으니까. 그는 스스로가 밟아 왔던 발자국의 길이를 재보고 그 안에 담긴 인고의 노력을 떠올렸다. 그는 입 밖으로 짧은 숨을 토해내며 말을 뱉었다.
“이곳이….”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지만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지금의 기분을 뭉개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저 그의 안에서 살금살금 피어오르는 따뜻하고 가벼운 그것의 모양을 달래 줄 필요가 있었다.
—--------------------------------------------------------------------------------------------------------------------------------------
아마 저쯤에 누군가가 감동과 환희에 취해 있겠지. 물론 그것은 좋은 일이야. 각자의 것은 각자의 것이니까. 하지만 나는 누군가를 붙들고 말할 수 없는 것 같아. 그것은 그러니까 어떤 것이며 이런 것이라고 말이야. 그럴 수가 없네. 참 어려운 일이지.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졌는지는 몰라도. 조금은 답답하긴 하지만 원하지 않으니 말해 줄 수도, 약간의 신호를 줄 수도 없는걸. 안타깝다. 나는 그냥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