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2024. 9. 20. 09:51

작은 세계의 혼란이 작을 것이라는 착각은 보통의 세계가 가지는 지루한 특권이다. 한 손으로 손가락 하나하나를 구부려 나이를 세고 다른 손으로는 셀 필요가 없는 아이의 세계에서는 분명 혼란의 폭풍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혼란은 아이의 머리카락 끝의 부드러운 시작부터 발가락 위에 연하게 자리 잡은 껍질의 끝까지 꽉 차 있었다. 아이는 혼란이 주는 진동에 미약하게 온몸을 엇박자로 자리하고 있었다. 간혹 아이의 엄마가

“안돼 그거 위험해.”

라고, 부르는 진동이 아이를 거꾸로 뒤집어 버리기도 했다. 뒤집어 넘어진 아이의 엉덩이와 무릎을 털어낸 엄마는 아이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위험하다가 했잖아.”

아이는 자신의 몸을 사랑스럽게 툭툭 털어내는 엄마의 눈을 보며 혼란의 숙주에 대해 꺼내 놓고 떠올렸다.
‘누굴까’
혼란의 숙주. 그러니까 아이의 의문이 심어 놓은 고민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엄마의 음성, 엄마의 행동, 엄마의 눈빛이 일구어놓은 어떤 껍질에 대해 확실하게 여기지 못하는 것이니까. 아이는 언젠가부터 엄마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분명 엄마라고 하지 않을 것이 없는데도 아이는 자신의 혼란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저버리지 못했다. 엄마가 전화기를 붙잡고

“그러니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라고, 말할 때는 그녀의 미간과 누렇게 떠 있는 얼굴빛이, 그리고 가끔 덜덜 떨며 물어 대는 손톱의 딱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다른 형상으로 보였다.
‘누굴까’
아이는 자신이 눈에 삼켜지듯 들어오는 여자의 형상을 보았지만 분명 엄마의 그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신경질로 이루어진 찰흙으로 대충 눌러 만든 것 같았다. 아이는 여자가 궁금해 여자의 신체를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여자는 아이의 신호에 아래를 내다보며 말했다.
“졸려?”
곱게 울려오는 여자의 음성은 분명 엄마의 모양이었다. 아이는 엄마의 눈을 보며 혹시나 안쪽에 있을 여자의 형상을 찾아 헤맸다. 엄마가 여자를 잡아먹은 것일까. 여자가 엄마를 잡아먹은 것일까. 만약 둘 중 하나가 사실이라면 먹힌 쪽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먹은 쪽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아이의 안쪽에 자리 잡은 혼란은 조금 더 커지고 단단해져 아이의 그릇을 꾹 하고 눌러댔다.

엄마와 다른 몇몇 아줌마들은 무언가를 마시며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보통은 하얗게 들어오는 햇빛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때에 있는 상황인데, 이때 아줌마들의 자식들은 아이와 붙어 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이는 아줌마들과 떠드는 엄마를 흘끔흘끔 보는 것으로 노는 것을 대신했다. 아줌마들과 떠드는 그것은 엄마도 아니고 그 여자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면 여자와 엄마를 반반으로 섞어 놓아 필요에 따라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아이의 혼란은 밀도를 올려 아이가 숨 쉬기를 불편하게 했다.

저녁때가 되면 아이의 아빠가 밝은 듯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다가와 꽉 껴안았다. 아이는 아빠의 몸에서 나는 쇳가루 냄새와 알 수 없는 알싸한 냄새를 동시에 맡으며 기름지게 끈적한 아빠의 얼굴을 손으로 꾹꾹 주물렀다. 아빠는 자기 자식의 손짓에 이상하게 기뻐하며 다시 꼭 안았다.

늦은 밤.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날카로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이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자기 방에서 조심스럽게 나와 멀찍이 떨어진 안방의 풍경을 감상했다. 엄마는 아빠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고, 아빠는 쏘아붙인 그것을 떠듬떠듬 받아 내다가 이내 본인도 엄마에게 쏘아붙였다. 아이는 엄마, 아니 그 여자의 형상을 보며 어쩌면 저것이 진정한 정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혼란은 그 여자의 진짜 정체를 담아내며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꽉 차게 이루어져 갔다. 혼란의 크기가 변할수록 아이의 폐를 꽉 움켜쥐었는데, 아이는 참지 못하고 기침했다. 두 남녀는 아이의 기침에 화들짝 놀라 부랴부랴 나누던 날카로움을 끊어내고 어색하게 붕 떠 있는 공기를 모른척하며 아이를 방에 밀어 넣었다. 아빠는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아이가 잠들 때까지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이는 아빠의 손길에 눈을 꼭 감고 며칠 전부터 할 수 있게 된 자는 척을 조금씩 펼쳐 보였다. 어설픈 아이의 자는 척에 아빠는 어쩐지 쉽게 걸려 넘어가고 아이의 방을 나갔다.

아이는 아빠가 방을 나가고 나서 거실에 자박자박 울려 대는 아빠의 발자국을 알아차리며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티 나지 않게 자기 방문에 붙어 아빠가 거실 소파에 하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아빠는 작고 투명한 잔에 투명한 물을 쑥 붓고는 자기 입으로 콱 넣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인상을 썼다. 아이는 아빠가 먹는 것이 맛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렇게 인상을 쓰며 먹는 물이라니 아이는 자기가 먹는 것 중에 그런 것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다가 마시는 것 중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일그러짐이 더 희한하게 느껴졌다. 그는 투명한 것을 입에 털어 넣을 때마다 무언가를 중얼거렸는데, 아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가 그 여자가 되었던, 혹은 그 여자의 온전한 모습이 피할 곳 없이 자기 눈으로 들어왔던 그때처럼 아빠의 어떤 것을 보았다. 아이는 차마 그에게도 이런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지 끝끝내 생각으로 확실히 끄집어내지 않고 조용히 침대로 올라가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의 혼란은 이미 아이의 몸체를 조금 벗어나 스스로 아이의 생각을 끄집어내 침대 위에 버젓이 그려졌다.

‘누굴까’


그러나 그러한 혼란도 아이의 무거운 눈꺼풀에 눌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