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용암
깊은 용암 안에는 밝고 울렁거리는 호수가 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 걸까. 사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
라며 용암 안에 호수를 상상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호수는 맑을까?
호수는 차가울까?
호수는 물렁거릴까?
호수는 손안에 흐를까?
만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용암 속 호수를 손으로 푹 떠서
“이게 용암 안에 있는 호수야!”
라고 사람들에게 떠들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용암은 자기 안에 꼭꼭 숨겨져 있는 호수를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다면, 용암은 호수를 어떻게 견뎌 낸 것일까. 어쩌면 용암은 호수를 모른 척한 것은 아닐까. 울렁울렁 움직이는 호수를 모른척하고 태연하게 꾸르륵꾸르륵 흘렀던 것일까. 만약 용암이 호수를 품고 모른 척한 것이라면 그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을 것이다. 열기의 끈적한 것을 꽉 채워 넣은 용암이, 사실은 이런 호수를 가지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러고 보니 용암 안에 호수를 보려면 용암의 뜨겁고 불뚝거리는 껍질을 찢고 들어가야 하는데,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덜렁거리는 앞니와 부실한 손톱밖에 없었다. 내 가느다란 몸체를 용암에 부딪쳐 용암의 껍질을 떼어 내겠다는 건전한 생각을 해봤지만, 용암의 겉면이 더욱 꾹꾹 눌려 단단해지는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용암 안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영영 없는 것이니, 절망하고 주저앉기 전에 그런 생각은 용암의 불구덩이로 던져버려야 했다.
그런데 나는 어찌 되었든 용암 안에 호수를 조금 더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호수의 거처 문제가 약간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용암 안에 있을까. 푸르고 맑은, 하지만 조금은 음산한 바위의 틈 안에 멋들어지게 호수가 있었으면 그럴듯하지 않았을까. 우연히 바위를 지나는 사람을 보면, 바위의 틈에 있던 요란한 요청 하나가 튀어나와서
“소원을 들어줄게, 대신 네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하나를 호수에 던져야 해.”
라는 시답지 않은 질문을 하지만, 스스로 소중한 게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시간 낭비만 하다가
“그냥 머리카락만 하나 넣어. 머리카락만큼 소원을 들어줄게”
라며 자조 섞인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호수가 용암 안에 있으니, 사람의 걸음은 조심성과 생명의 위험 같은 것 때문에 요정의 근처로 다가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수의 요정은
“그냥 이곳을 발견이라도 해라.”
라며 용암의 꿉꿉한 냄새를 맡고 있지 않았을까.
불필요한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에 숫자를 셀 수 없는 날벌레 무리가 용암을 향해 돌진 했다. 날벌레들은 용암의 껍질에 녹아 날개를 잃고, 꺾인 목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최후에는 불뚝거리는 용암의 껍질에 온몸을 묻으며 생을 마감했다.
혹시 날벌레들은 호수의 존재를 알고 돌진 했던 것일까. 만약 날벌레들이 호수의 존재를 알고 용암에 달려든 것이라면, 나는 그들의 용기와 모험심에
“그래도 몸을 던지는 건 좀….”
이라며 시원찮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굳이 용암 안에 있는 호수를 무턱대고 찾을 필요는 없었다. 언젠가 용암은 자신의 껍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용암 안에 호수는 또르르 하며 밖으로 흘러갈 것이다. 나는 그때 흐르고 있는 그것이 용암 안에 있던 호수였는지, 바위틈에 푹 파여 있던 호수였는지 알아보면 된다.
그 후에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저 물은 용암에서 흘렀던 거야.”
라고, 말하는 것이고, 내 말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을 보며
‘어차피 믿을 거로 생각하지도 않았어.’
라며 든든한 외로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