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할인
여자는 새 비닐에 따뜻한 빵을 조심스럽게 넣으며 말했다.
“요즘은 바쁘신가 봐요?”
여자는 그러면서 남자를 향해 직접적이고 분명한 시선을 보내기는커녕 자기 말을 뱉어 놓고 그저 묵묵히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비닐에 빵을 담는 여자의 손길은 기계처럼 건조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초조함 같은 게 있었다. 여자의 초조함이, 숨과 손 움직임 사이에 꽉 차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게 했다. 남자는 다행히 여자의 초조함이 어느 한계를 넘어가기 직전에 대답했다.
“뭐, 그렇네요.”
여자는 남자의 대답에 안심하고 다시 초조함을 뺀 담백한 손놀림으로 투명한 비닐에 빵을 담았다. 남자는 여자의 손놀림을 구경하며 자기 바로 앞에 놓인 팻말을 보았다.
[전날 생산 할인 행사]
팻말 아래는 여자가 손수 움직여 놓고 있는 따뜻한 것과는 달랐지만 맛과 모양에는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그것들은 과감하게 본래의 가치를 몇 토막 낸 가격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진열된 그것들을 살피다 자신의 단단한 손으로 몇 개의 빵 묶음을 손으로 쓸어보고 그중 가장 묵직해 보이는 묶음을 뽑아내듯 들었다. 여자는 남자가 손으로 뽑아낸 빵 묶음을 직접 보지 않고 곁눈질했다. 남자는 손에 빵 묶음을 쥐고는 성큼성큼 여자에게 다가왔다. 여자는 비닐에 빵을 담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지만, 숨소리만큼은 조금씩 불규칙하게 변했다. 하얀 위생모자 아래 가려진 여자의 눈은 자신의 손이 아닌 남자의 신발 끝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남자는 여자가 담고 있는 신선한 빵을 보고는 말했다.
“좋네요.”
여자는 남자의 말에 순간 차가운 무언가가 머리를 관통해 저 멀리 지나간 것을 느꼈다. 여자는 지나간 무언가의 충격으로 잠시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어 대답했다.
“뭐…. 그렇죠.”
남자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 인사를 하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여자는 그제야 남자의 뒷모습을 확인했다. 그녀는 남자의 듬직한 뒷모습을 보고 입을 들쑥날쑥하며 가만히 두지 못했다.
여자는 조금 있으면, 그러니까 올해의 따뜻함이 꽃필 무렵에, 남자가 자신과 익숙하고 가까운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자는 그것이 전혀 뚱딴지같은 생각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 이유라는 것은 회색빛 마트 구석에 자리 잡은 빵 판매대에 매일, 그것도 같은 시간에 빵을 사 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는 가끔
‘내가 과하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
라고 우울해하며 눈가에 어둡고 익숙한 주름을 만들어 냈지만, 그때마다 우연히도 남자가 어떤 선을 넘는 다정함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다정함은 아닐 것이라면 여자는 확신했다. 여자는 안정된 상상을 하며 또다시 입을 들쑥날쑥 움직였는데 옆에 직원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아 그 크기를 줄였다.
[전날 생산 할인 행사]
여자는 팻말을 보며 약간 우울해 하기도 했다. 방금까지 흘러넘칠 것 같은 여자의 기분이 갑자기 어딘가로 떨어져 가는 것이다.
‘혹시 모르나?’
여자는 남자가 알아볼 만한 신호를 보냈음에도 인연의 단계라고 불릴만한 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가 알아볼 만한 신호라는 것은
[전날 생산 할인 행사]
에 꽂혀 있는 수많은 빵 봉지의 가격을 여자가 손수 붙였으며 그때마다 그녀는 가격의 값을 저렴하게 붙여 놓았다. 저렴한 가격은 전날 상품이라는 것과, 묶음 세일이라는 장막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은밀히 보내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가 좀처럼 그 신호를 확인해 보지 않는 것 같아 조금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여자의 기계 같던 손길은 감정을 가지고 몇 번의 실수를 하더니 이내 다른 직원의 눈총을 샀다.
“이런 빵은 어디서 사 오는 거야?”
어떤 남자는 빵 봉투 몇 개가 붙어 있는 것을 손으로 흔들며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어떤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사거리 마트 빵 판매대에서.”
친구는 그 말을 끝으로 빵 봉투 하나를 뜯어 남자에게 빵 한 덩이를 건네고 자신도 입에 넣었다. 남자는 입안에 빵 한 움큼을 넣고 빵 봉투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확인했다.
“싸네”
친구는 빵을 씹으며 꾸역꾸역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 막힌 소리로 답했다.
“거기는 항상 싸.”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곳이네.”
친구도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좋은 곳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