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2024. 8. 17. 14:21

그녀와 꿈같은 상상을 하는 그를 보면, 상상이 주는 달콤함은 사람을 들뜨게 하는 게 확실하다. 그러나 상상은 또한 그의 신경질을 한 가닥 한 가닥 긁어모아 그를 분노의 제단에 올려놓는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한다.
그는 평소에도 붉은 남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붉은 남자는 성실함과 거리가 먼 불규칙의 화신인 동시에
“그런 건 괜찮지 않아?”
라며 사람들과 간단하고 쉬운 대화를 한다. 오늘도, 어제도, 지난주에도 성실함의 기계화를 몸에 장착한 듯 일정한 출근을 하는 그로써 붉은 남자의 불성실함과 나른함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장은 붉은 남자의 불성실함과 나른함을 질책하기는커녕
“그래, 자네 말대로 하자고.”
같은 한심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기껏 붉은 남자가 내놓은 아이디어라고 해봐야 아주 오래전 그도 잠깐 생각해 두었던 요행 정도인데. 어째서 사장은, 아니, 회사의 모든 사람은, 아니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은, 붉은 남자의 불성실함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상한 환상에 빠져 그 남자를 신뢰하는 것일까.
그는 혹시나 간단한 요행도 인정을 받는 것인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사장에게 조심스럽게 아이디어를 냈지만
“글쎄, 그건 조금 생각을 해보자고.”
같은 정중한 거절을 듣는다. 만약 그가 성실한 출근과 단단한 자리 지키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딴 걸 아이디어라고 내놔!”
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사장의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과 구겨진 미간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성실함과 단단한 자리 지키기가 이런 식으로 쉽게 소모되는 걸 바라지 않아 다시는 아이디어를 가장한 요행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는 그래서 억울함과 분노 비슷한 열기를 심장 근처에 꾹 뭉쳐 놓고 묵묵하게 성실함을 이행했다. 그는 농담할 줄도, 여유롭게 일 처리를 하지도 못했다. 그저 하루 안에 정해진 일과의 기둥으로 자신의 시간을 꽉 채워 넣는 것이다. 아무도 몰라 주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길뿐이었다.
어느 날은 그가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물론 친구들도 그의 꽉 눌린 열기를 해소해 주지는 못했지만
“그런 게 말이 되냐고?”
라고, 울부짖는 그의 모습에
“그건 문제가 있네….”라며 억지로 받아주는 것 정도는 했었다. 별로 바뀌는 것 없는 이야기가 반복되자 그는 친구들에게 내주었던 성실함이 조금씩 소모되는 것을 느끼고 약간은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무도 내 얘기는 안 듣겠구나.’
라고 말이다. 그는 깎여 나간 성실함과 단단함의 기둥을 살피고 삐끗대는 한숨을 내뱉으며 친구들과 헤어졌다.
그는 닳아버린 구두 코끝을 보며 교체되는 보도블록만 더듬어 집으로 향했다.


“…. 않아?”
그는 순간 바닥으로 향했던 시선을 번쩍 들어 익숙한 소리의 발원지를 찾았다.
“…. 요?”
그러니까 그의 열기와 답답함의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녀는, 하얀 원피스를 산뜻하게 걸치고 고슬고슬한 잔머리를 약간 휘날리며 붉은 남자의 손끝을 간신히 잡고 있었다.
그의 상상대로다. 그가 그녀와 상상했던 자잘한 움직임까지의 모든 것이 일치했다. 당사자가 그가 아니고 붉은 남자라는 사실 말고는. 그는 현실로 이루어진 어긋난 상상의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급하게 먼 길을 돌아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한참을 걸어갈 거리에 멀뚱하게 서 있게 되었다. 그의 머릿속은 불쾌하고 경망스러운 상상이 마구 날뛰며 어지럽게 널브러진 신경질을 한데로 모아 쾅 하고 터뜨렸다.
“….”
그는 그나마 안전한 허공에 어설픈 주먹질을 쏟아내려 했지만, 술이 만들어 놓은 헷갈리는 시야를 구분하지 못하고 전봇대에 손을 쾅 부딪친 것이다. 그는 급하게 부어오르는 손등을 보며 줄줄대는 열기를 눈가로 쏟아 냈다. 아파서 우는 것이 무엇인지 여실히 느끼는 그는 붉은 남자도, 사장도, 친구도, 그녀도 잊어버린 채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라며 중얼거렸다.